비행기는 너무 빠르고, 버스는 너무 좁고, 자동차는 너무 바쁘다. 기차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속도는 적당하고, 창밖은 끝없이 흐른다. 누군가는 유럽 여행을 ‘도시의 나열’로 기억하지만, 기차 여행을 해본 사람은 그 틈의 아름다움을 더 오래 기억한다. 기차를 타고 유럽을 여행한다는 건, 경유지가 아닌 ‘이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이다.
좌석 하나로 국경을 넘다
유럽의 매력은 국경이 의미 없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파리에서 브뤼셀까지 1시간 20분, 뮌헨에서 잘츠부르크까지 1시간 반, 암스테르담에서 쾰른은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여권 검사도 거의 없고, 입국 심사도 생략되는 유로존의 기차 시스템은 여행자에게 그 어떤 스트레스도 주지 않는다. 단 하나의 좌석에서, 도시가 바뀌고 언어가 바뀌고 커피 맛이 달라지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이동 자체가 새로운 나라를 통과하는 경험이 된다.
풍경은 창 밖에서 펼쳐지는 영화
기차는 유럽을 가장 유럽답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짧은 거리라도 기차를 타면, 언덕 위 성, 해바라기 밭, 포도밭, 알프스 초원이 창 밖을 스쳐 지나간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 덕분에 잠깐 졸다 눈을 떴을 때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기분은 잊을 수 없다. 특히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북부 노선은 진짜 영화 속 풍경 그대로다. 카메라보다 눈이 바빠지는 노선에서, 기차는 여행자에게 가장 로맨틱한 시네마를 상영한다.
하루치 도시, 이틀치 감정
도시 간의 짧은 거리 덕분에 유럽에서는 아침에 한 나라에서 커피를 마시고, 오후엔 다른 나라에서 와인을 마시는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기차를 타는 순간, 도시만 바뀌는 게 아니라 감정의 결도 바뀐다. 한 도시에서 쌓인 감정은 고스란히 가방에 담긴 채 기차 칸 안으로 들어오고, 기차는 그걸 천천히 비워주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아무 말 없이 앉아있기에도 너무 좋은 공간. 기차 안에서 보낸 감정은 도시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다.
유레일 패스, 그리고 기차 여행자의 루틴
기차 여행의 핵심 도구는 단연 ‘유레일 패스’다. 한 번 발급받으면 30개국에서 자유롭게 기차를 탈 수 있다. 연속 이용형(연속된 기간 사용)과 선택 이용형(원하는 날짜만 선택)으로 나뉘며, 스마트폰 앱 하나로 예약과 탑승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프랑스의 TGV, 독일의 ICE, 이탈리아의 프레차로사까지 모두 한 패스로 이용 가능하다. 좌석 예약만 하면 된다. 기차 여행자의 루틴은 단순하다. 전날 밤 숙소에서 노선 확인 → 아침 기차 → 창밖 감상 → 도착 → 체크인. 짐 싸기와 이동 스트레스 없이, 유럽은 연결된다.
결론 – 빨리 가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여정
기차는 늘 시간을 조금 더 쓰게 만든다. 그게 답답한 게 아니라, 오히려 좋다. 빠르게 도착하는 게 중요한 여행도 있지만, 기차 여행은 도착보다 ‘흐름’을 위한 여정이다.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도시와 도시 사이를 흐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생각도 정리된다. 파리에서 밀라노,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 뮌헨에서 루체른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도시 이름이 아닌 마음의 여백으로 남는다. 그게 바로 유럽 기차 여행의 본질이다.